스터디에서 陵陽李氏가 나왔다.
누군가해서 인용성씨를 살펴보니, 闕이라 하여 관련 정보가 없다.
陵陽李氏로 사고전서를 검석하니, 정문검색에서는 총 5건이 나온다.
호위(胡渭, 1633~1714)의 『역도명변』, 요순목(姚舜牧, 1543~?)의 『시경의문』, 왕극관(汪克寬, )의 『춘추호전부록찬소』, 『四書大全 大壑章句大全』, 조학전(曹學佺, 1574~1646)의 『촉중광기』에 나온다.
이중 『역도명변』에 능양이씨의 말을 인용하면서 소주로 心傳이라 이름이 나온다.
사고전서 주석문자 검색에서는 능양이씨의 글이 14건이 인용된다.
『周易筮述』, 『禮記纂言』 2회, 『春秋纂言』 2회, 『春秋胡傳附錄纂疏』, 『孝經定本』, 『四書纂疏 中庸簒疏』, 『四書纂疏 孟子簒疏』 4회, 『四書通 孟子通』 4회, 『四書大全 孟子集註大全』 4회, 『四書大全 中庸或問』 1회 등 총 14회가 나온다.
중국역대인명사전의 이심전 항목이다.
陵陽李氏는 이심전(李心傳, 1167~1244)이다.
쉽게 찾았..
사고전서에는 『建炎以來朝野雜記』, 『舊聞證誤』, 『建炎以來繫年要錄』, 『道命錄』, 『丙子學易編』 등 5종의 책이 수록되어 있다. 저술에 『춘추고』가 있는 것으로 인명사전에는 나오는데, 사고전서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같은 제목으로
섭몽득(葉夢得)의 『춘추고』가 있다.)
<참고자료>
(사고전서총목제요는 http://ssp21.or.kr/db/에서 볼 수 있다.)
사고전서총목제요의 『역도명변』이다.
청나라 호위(胡渭, 1633~1714)1)가 지었다. 호위의 원래 이름은 위생(渭生)이고, 자는 비명(朏明)이고, 호는 동초(東樵)이며, 덕청(德淸) 사람이다. 이 책은 오로지 「하도」와 「낙서」를 변론하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다.
처음에 진단은 『역』의 이치를 추론하여 밝히면서 여러 가지 그림을 연역했는데, 그 그림은 본래 『역』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괘와 효를 가지고 반복해서 연구하면 부합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전수한 자들이 힘써 그 이론을 신비화시켜서 마침내 그 그림[의 작자를] 복희씨에게 귀결시키고서 『역』이 도리어 그림으로 말미암아서 지어졌다고 말하였다. 또한 「계사전」의 「하도」ㆍ「낙서」와 관련된 문장을 근거로 해서, 대연의 산수를 취해서 55개의 점으로 된 그림을 만들어서 「하도」에 해당시키고, 『건착도(乾鑿度)』의 태을구궁법(太乙九宮法)을 취해서 45개의 점으로 된 그림을 만들어서 「낙서」에 해당시켰다.
진단이 주장한 음양의 기수와 우수도 또한 하나하나 『역』과 서로 호응한다. 그런데 전수한 자들이 그 이론을 더욱 신비화하여, 또한 [기수와 우수를] 진짜로 용마와 신비한 거북이 등에 지고 나온 것으로 여기고는 복희(伏羲)가 이것을 근거로 해서 선천의 그림을 만들었다고 말하니, 실로 당나라 이전의 책 중에는 [이러한 주장을] 징험할 수 있는 내용이 결코 한 자도 없었는데, 북송의 초에 갑자기 나왔다. 대개 중성(中星)2)을 헤아려서 의기(儀器)를 만들었기 때문에 [의기로] 중성을 징험하면 부합하지 않음이 없지만, 중성이 의기(儀器)에서 생겨났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교식(交食)3)을 살펴서 『산경(算經)』을 만들었기 때문에 [『산경』으로] 교식을 징험하면 부합하지 않음이 없지만, 교식이 『산경』에서 생겨났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소옹으로 말미암아서 주희에 이르기까지 또한 다만 교묘하게 합치되는 숫자만을 취하였지 그것이 태고 이래로 누구로부터 전수되었지를 연구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역학계몽』과 『주역본의』 앞의 9개의 그림은 모두 소옹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는데, 같은 시대의 원추(袁樞, 1131~1205)4)와 설계선(薛季宣)은 모두 이론(異論)이 있었다. 그런데 『송사』 「유림전」을 살펴보면 『역학계몽』은 주희가 본래 채원정(蔡元定)에게 맡겨서 원고를 만든 것이지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다. 『주자대전(朱子大全)』 속에 「유군방에게 답하는 편지[答劉君房書]」가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역학계몽』은 본래 배우는 자들이 장차 『주역대전』으로 나아가기를 원해서 [지은 책인데], 거기에서 말한 괘획(卦畫)이나 시수(蓍數)의 탐구는 그다지 헛된 이론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건대 「하도」ㆍ「낙서」와 같은 경우는 또한 여전히 쓸데없는 말이 있다.” 『주역본의』의 책머리에 있는 9개의 그림의 경우에 왕무횡의 『백전잡저(白田雜著)』에서 [주희의] 문집과 어류를 가지고 조사하고 고찰하였는데, 대부분 서로 모순되었지만, 진실로 그 문인들이 [그 이론에] 의지하여 따름으로써 그 이론은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으니, 주희는 당시에 그 이론을 강하게 주장한 적이 없다. 원나라 진응윤(陳應潤)이 『효변의온(爻變義蘊)』을 지어 처음으로 선천(先天)의 여러 그림은 도가가 『역』의 이치를 빌어서 수련의 기술로 삼은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오징ㆍ귀유광(歸有光,1506~1571) 등의 여러 사람들도 또한 서로 이어가면서 [이 이론을] 배격하고, 각각 논술을 지었다. 청나라 모기령이 『도서원천편(圖書原舛編)』을 짓고, 황종희가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을 짓었으며, 황종염이 『도서변혹(圖書辨惑)』을 지어서 더욱더 강력하게 쟁론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이 본 것에 근거해서 그 이론의 허점을 공격할 뿐 여전히 그 이론의 실체를 따져서 그 유래를 일일이 들추어내지는 못했다.
호위의 이 책의 1권은 「하도」와 「낙서」를 논변하였고, 2권은 오행구궁(五行九宮)을 논변하여쓰며, 3권은 『주역참동(周易參同)』과 선천태극(先天太極)을 논변하였고, 4권은 「용도(龍圖)』와 「역수구은도(易數鉤隱圖)」를 논변하였으며, 5권은 『역학계몽』의 여러 그림을 논변하였고, 6권과 7권은 선천(先天)의 고역(古易)을 논변하였으며, 8권은 후천지학(後天之學)을 논변하였고, 9권은 괘변(卦變)을 논변하였으며, 10권은 상수(象數)의 폐단을 논변하였다. 모두 옛 문장을 인용하여 근거로 삼았고, 서로 참조하여 증명함으로써 [근거없는 이론에] 의탁하는 자들의 입을 틀어막아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도서의 이론이 비록 말에 근거가 있고 주장에 이치가 있어서 수련(修煉)·술수(術數) 두 학파가 『역』의 지류로써 분류되어 있기는 하지만 『역』을 지은 근본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그가 지은 『우공추지(禹貢錐指)』와 비교해본다면 경학 분야에 더욱더 공적이 있는 것이다. (선우훈만)
易圖明辨十卷 浙江巡撫採進本
國朝胡渭撰. 渭原名渭生, 字朏明, 號東樵, 德淸人. 是書專爲辨定圖書而作. 初, 陳摶惟闡易理,衍爲諸圖. 其圖本凖易而生, 故以卦爻反覆硏求, 無不符合. 傳者務神其說, 遂歸其圖於伏羲, 謂『易』反由圖而作. 又因「繫辭」, 「河圖」·「洛書」之文, 取「大衍算數」作五十五點之圖, 以當河圖. 取『乾鑿度』太乙·九宮法造四十五點之圖, 以當「洛書」. 其陰陽奇偶, 亦一一與易相應. 傳者益神其說, 又眞以爲龍馬, 神龜之所負, 謂伏羲由此而有先天之圖. 實則唐以前書絶無一字之符騐, 而突出于北宋之初. 夫測中星而造儀器, 以騐中星無不合, 然不可謂中星生于儀器也. 候交食而作算經, 以騐交食無不合, 然不可謂交食生於算經也. 由邵子以及朱子, 亦但取其數之巧合, 而未暇究其太古以來從誰授受, 故『易學啓蒙』及『易本義』前九圖皆沿其說. 同時袁樞, 薛季宣皆有異論. 然考『宋史』「儒林傳」,『易學啓蒙』朱子本屬蔡元定創稿, 非所自撰. 『晦菴大全集』中載「答劉君房書」曰, “『啓蒙』本欲學者且就『大傳』所言卦畫蓍數推尋, 不須過爲浮說, 而自今觀之, 如「河圖」·「洛書」亦不免尙有剰語.” 至於『本義』卷首九圖, 王懋竑『白田襍著』以『文集』·『語類』鉤稽參考, 多相矛盾, 信其爲門人所依附, 其說尤明. 則朱子當日亦未嘗堅主其說也. 元陳應潤作『爻變易蘊』, 始指先天諸圖爲道家假借『易』理以爲修煉之術. 呉澄, 歸有光諸人亦相繼排擊, 各有論述. 國朝毛奇齡作『圖書原舛編』, 黃宗羲作『易學象數論』, 黃宗炎作『圖書辨惑』, 爭之尤力. 然皆各據所見, 抵其罅隙, 尙未能窮溯本末, 一一抉所自來. 渭此書, 卷一辨「河圖」·「洛書」, 卷二辨五行九宮, 卷三辨周易參同·先天太極, 卷四辨龍圖易數鉤隱圖, 卷五辨啓蒙圖書, 卷六·卷七辨先天古『易』, 卷八辨後天之學, 卷九辨卦變, 卷十辨象數流弊. 皆引據舊文, 互相參證, 以箝依托者之口, 使學者知圖書之說, 雖言之有故, 執之成理, 乃修煉, 術數二家旁分『易』學之支流, 而非作『易』之根柢. 視所作『禹貢錐指』, 尤爲有功於經學矣.
『시경의문』
명나라 요순목(姚舜牧, 1543~?)1)이 지었다. 요순목은 『역경의문(易經疑問)』도 지었는데, 이미 저록되어 있다.2) 이 책은 시 해석에 『모전(毛傳)』과 주희의 『시집전』 및 엄찬(嚴粲)의 『시집(詩緝)』을 함께 사용하였고, 때때로 자기의 새로운 논의를 내놓았다. 예를 들면 성왕이 주공에게 천자의 예악을 하사한 적이 없음을 변론한 주장은 탁월한 견식이 있다. 또한 삼경(三經)과 삼위(三緯)의 이론3)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賦)․비(比)․흥(興)은 통합해서 뜻을 취해야지, 이것은 부이고 이것은 비이며 이것은 흥이라고 확연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확연하게 세 가지로 나누기 때문에 시의 이론을 탐구할 수 없으니, ‘부이면서 흥이고 또한 비이다.’라고 하거나 ‘부이면서 비이고 또한 흥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점점 그 의미를 상실해버렸다.”4) 이 주장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론들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요순목은 여러 경전에 대해서 모두 ‘의문(疑問)’이라는 책이 있는데, 시를 해석한 이 책이 다른 책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자서」에서 “[내가 책에서] 의심한 내용은 모두 수십 년을 거쳐서 거듭 교정하고 되물은 것이다. 이 앞서 잘못 해석한 것은 여러 번 변론하여 바로잡았다.”5)라고 하니, 비교적 깊이 힘을 쏟은 듯하다. 다만 [시의] 글자가 다소 가차되어 통용되었다는 옛 사람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고, ‘용광(龍光)’6)이나 ‘반환(伴奐)’7)과 같은 종류에 대해서 곧바로 본래 글자대로 해석하고,8) 억지로 변론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융경(隆慶)과 만력(萬曆) 이후의 학자들이 고서를 적게 보았기 때문이니, 또한 훈고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풀이한] 의리가 틀리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동민)
詩經疑問十二卷 內府藏本
明姚舜牧撰. 舜牧有『易經疑問』, 已著錄. 是編釋詩, 兼用『毛傳』∙『朱傳』及嚴粲『詩緝』, 時亦自出新論. 如辨成王未嘗賜周公天子禮樂, 其說頗爲有見. 又論三經三緯之說, 謂賦∙比∙興乃通融取義, 非截然謂此爲賦∙此爲比∙此爲興也. 惟截然分而爲三, 於是求之不得其說, 則將爲賦而興又比也, 賦而比又興也, 而寖失其義. 其說亦足解轇轕之談. 舜牧於諸經皆有疑問, 惟此編說『詩』爲差善. 「自序」稱所疑凡經數十年, 重加訂問, 前此誤解, 亟與辨正, 蓋其用力較深也. 惟不信古人字少假借通用之說, 於‘龍光’∙‘伴奐’之類, 皆徑以本字解之, 强生論辨. 是則隆萬以後儒者少見古書之故, 亦足見詁訓不明而欲義理之不謬, 無是事矣.
『춘추호전부록찬소』
원나라 왕극관(汪克寬)이 지었다. 왕극관은 『경례보일(經禮補逸)』도 지었는데 이미 저록되어 있다.1)
이 책의 앞에는 왕극관의 「자서」가 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 나라들의 연대와 시호를 상세하게 주석하여 사실의 대부분을 연구할 수 있으며, 『춘추』 경문의 차이를 갖추어 나열하여 성인이 기록한 진의를 구할 수 있다. 제가의 설을 더하여 호안국이 의문스러운 것을 빼놓은 것을 보충하고, 「판의(辨疑)」와 「권형(權衡)」을 덧붙였으니 3전의 장단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체적인 요지는 결국 호안국의 『춘추전』을 종주로 삼았다. 고찰해보면 『원사』 「선거지(選擧志)」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연우 2년(1315)에 경의(經義)와 경의(經疑)의 취사[인재를 선발함] 조격[법령이나 법규조항]을 정하였는데, 『춘추』는 3전 및 호안국의 『춘추전』을 사용하였다.” 우집(虞集, 1272~1348)2)의 「서문」에 그 일을 언급하고 있으니, 아마도 겸하여 과거를 위하여 갖추었을 것이다. 이는 오징이 유고(兪臯)3)의 『춘추석의(春秋釋義)』의 「서문」에서 “호안국의 『춘추전』으로써 시대의 추세를 따른 자이다.”라고 한 것이다. 진정(陳霆)4)의 『양산묵담(兩山墨談)』에서 이 책이 노나라의 교사(郊祀)에 하나라의 역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과, 다시 노나라의 증상(烝嘗)에 주나라의 역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비난하고 있으니, 이것은 역시 호안국의 『춘추전』을 옮겨 나간 것인데 둘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한 하나의 증거이다. 그런데 호안국의 『춘추전』의 이론에 대해 하나하나 이론이 나온 것을 끌어들여 고찰할 수 있으니, 마치 주에 소가 있는 것과 같아서 호안국의 학문에 대해서 상세히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명나라 영락 연간(1402~1424)에 호광 등이 『춘추대전』을 정리하였는데 그 「범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연대기는 왕극관의 『춘추호전부록찬소』에 의거하고, 지명은 이염(李廉)의 『춘추제전회통(春秋諸傳會通)』에 의거하고, 경문은 호안국을 근거로 삼았으며, 체례는 임씨에 의거했다.” 사실은 모두 왕극관의 이 책을 베낀 것으로, 원본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하나하나 서로 비교할 수 있다. (김종석)
春秋胡傳附錄纂疏三十卷 浙江吳玉墀家藏本
元汪克寬撰. 克寬有『經禮5)補逸』已著錄. 是書前有克寬「自序」稱“詳註諸國紀年∙諡號, 可究事實之悉, 備列經文同異, 可求聖筆之眞. 益以諸家之說, 而裨胡氏之闕疑, 附以「辨疑」∙「權衡」, 而知三傳之得失.” 然其大旨終以胡傳爲宗. 考『元史』「選擧志」“延祐二年定經義∙經疑取士條格, 『春秋』用三傳及胡安國『傳』”. 虞集「序」中亦及其事, 蓋兼爲科擧而設. 吳澄「序」兪臯『春秋釋義』所謂“以胡『傳』從時尙者也.” 陳霆『兩山墨談』譏其以魯之郊祀爲夏正, 復以魯之烝嘗爲周正, 是亦遷就胡『傳』, 不免騎墻之一証. 然能於胡『傳』之說, 一一考其援引所自出, 如注有疏, 於一家之學亦可云詳盡矣. 明永樂中胡廣等修『春秋大全』, 其「凡例」云“紀年依汪氏『纂疏』, 地名依李氏『會通』, 經文以胡氏爲據, 例依林氏.” 其實乃全勦克寬此書, 原本具在, 可以一一互勘也.
『촉중광기』
명나라 조학전(曹學佺, 1574~1646)이 지었다. 조학전은 『역경통론(易經通論)』도 지었는데, 이미 저록되어 있다.1) 조학전은 일찍이 사천우참정(四川右參政)이 되었다가 안찰사(按察使)로 승진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은 아마도 그때 완성한 것 같다.
항목[目]」이 모두 20가지인데, 「명승(名勝)」, 「변방(邊防)」, 「통석(通釋)」, 「인물(人物)」, 「방물(方物)」, 「선(仙)」, 「석(釋)」, 「유환(游宦)」, 「풍속(風俗)」, 「저작(著作)」, 「시화(詩話)」, 「화원(畵苑)」 등이 그것이다.
모으고 채집해 놓은 것이 많고도 풍부하기 때문에, 이 책 제목에 ‘폭넓게 모았다[廣記]’는 말을 넣은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그 중 서주부(敍州府; 지금의 四川省에 속함)에 있는 고주(高州)의 경우는, 『명사』 「지리지(地理志)」에는 “홍무(洪武) 5년(1372)에 주(州)에서 현(縣)으로 바뀌었다가, 정덕(正德) 13년(1518)에 다시 주로 바뀌게 되면서, 공현(珙縣; 지금의 四川省에 속함)과 균현(筠縣; 지금의 四川省에 속함)과 연현(連縣; 지금의 四川省에 속함) 등을 [이 고주에] 예속시켰다.”라고 말했는데, 이 책에서는 여전히 고주를 칭하여 현이라 하였고, 두 개의 현 역시 예속시켜 놓지 않았다. 또한 성도부(成都府; 지금의 四川省 成都)에 있는 자양현(資陽縣)의 경우는 『명사』 「지리지」에는 간주(簡州)에다 예속시켜 놓았는데, 이 책에서는 간주에다 넣어두지 않고 인수현(仁壽縣; 지금의 四川省에 속함)과 정연현(井硏縣; 지금의 四川省에 속함)의 뒤에다 배열해 놓았으니, 모두 편차가 서툴고 엉성함을 면치 못했다.
왕사정(王士禎, 1634∼1711)의 『고부우정잡록(古夫于亭雜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신의] 『단연록(丹鉛錄)』에 실려 있는 바, 소식(蘇軾, 1037∼1101)이 청신(靑神; 지금의 四川省 眉山市 靑神縣) 양동(楊棟)에게 준 사(詞)에 ‘우윤문(虞允文, 1110∼1174)2)의 사업이 조용히 끝났습니다. 민산(岷山)과 아미산(峨眉山; 지금의 四川省 峨眉山市)의 인물들을 따져보면 앞뒤에서 서로 기량을 뽐내면서 비춰주고 있는데, 듣건데 군왕이 일찍이 이와 같은 인재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고 합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는 소설(小說) 속에 나오는 바, ‘고종(高宗)이 마기(馬騏)에게, 촉(蜀) 땅에서 우윤문과 같은 인재는 몇이나 있는가를 질문하는 말’을 인용해서 윤색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우윤문이 [금나라 군사와] 채석(采石) 지역에서 싸운 일은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에 있었고, 이때 소식은 이미 죽은지가 오래되었는데 어떻게 이러한 내용의 편지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또 조학전[능시(能始)는 조학전의 자임]의 『촉중십지(蜀中十志)』에도 이 일이 실려 있지만, 기사가 생략되어 있고 또 이를 논박하여 바로잡지도 않았다.” 또 “『촉중십지』에서 「물류상감지(物類相感志)』 18권을 소식이 지었다고 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3)고 말하니, [이 책의 저자인 조학전의 글에는] 잘못되고 어긋난 것도 가끔씩 드러나고 있다.
대체로 이 책은 근거로 원용한 자료가 너무도 방대하여, 정미하거나 거친 자료가 모두 포괄되어 있고, 같거나 다른 내용도 정리되지 않은 채 나란히 진술되어 있다. [자료 수집 위주의 저서를 기획하다 보니] 사세(事勢)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이 책의 성격이] 이 책의 대체(大體)를 해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촉 지역의 장고(掌故)를 말하는 자들은 최종적으로 『전촉예문지(全蜀藝文志)』와 이 책을 [믿을만한] 자료를 취하는 연수(淵藪)4)로 삼고 있다. (김보경)
蜀中廣記一百八卷 兩淮馬裕家藏本
明曹學佺撰. 學佺有『易經通論』, 已著錄. 學佺嘗官四川右參政, 遷按察使, 是書蓋成於其時. 目凡十二, 曰「名勝」, 曰「邊防」, 曰「通釋」, 曰「人物」, 曰「方物」, 曰「仙」, 曰「釋」, 曰「游宦」, 曰「風俗」, 曰「著作」, 曰「詩話」, 曰「畵苑」. 蒐採宏富, 頗不愧‘廣記’之名. 其中如敍州府之高州, 『明史』「地理志」云“洪武五年由州改縣, 正德十三年復爲州, 珙及筠·連三縣隸焉.” 此書仍稱高州爲縣, 二縣亦不爲之屬. 又成都府之資陽縣, 『明史』「地理志」屬簡州, 此書不繫簡州, 而5)列於仁壽·井硏二縣後, 皆未免編次偶疏. 王士禎『古夫于亭雜錄』6)曰“『丹鉛錄』載東坡贈靑神楊棟詞云‘允文事業從容了. 要岷·峨人物, 後先相照, 見說君王曾有問, 似此人才多少.’ 而引小說‘高宗問馬騏, 蜀中人才如允7)文者有幾’云云. 案允文采石之功在南渡8)後, 東9)坡之沒久矣, 安得先有此詞10)? 而曹能始『蜀中十志』亦載之, 略無11)駁正12).” 又曰“『蜀中十志』以『物類相感志』十八卷爲東坡撰, 謬甚.” 則訛舛牴牾, 亦時時間出. 蓋援據旣博, 則精粗畢括, 同異兼陳, 亦事勢之所必至, 要之不害其大體. 談蜀中掌故者, 終以『全蜀藝文志』及是書爲取材之淵藪也.